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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ing the underreported threat of nuclear weapons and efforts by those striving for a nuclear free world. A project of The Non-Profit International Press Syndicate Japan and its overseas partners in partnership with Soka Gakkai International in consultative status with ECOSOC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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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ing Hiroshima For The Sake Of Our Common Future –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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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의미래를위해히로시마의피폭체험을기억한다

【동경 IDN = 몬즈루루 하크(Monzurul Huq )】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특히 전쟁과 파괴를 기록한다는 점에서는 오래 유지할 수 없는 것 같다. 인간의 고통과 처지를 그린 다양한 시대의 자세한 기록이 무수히 남아 있지만 인류는 아마도 그러한 것을, 뭔가 애매한 것이 아니면 추상적인 것, 혹은 일상의 현실과 무관한 뭔가 먼 동떨어진 일어난 것처럼 이해하는 것 같다. 막연하게 인식된 것은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으며,동떨어진 사건에 대해서 심을 격렬하게 흔들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계속한 비극적인 현실이 불안을 보이고 아무리 단기간이라도 비교적 평온한 상황에의 길을 발견하면 순식간에 전쟁과 파괴가 인류에게 미치는 피해를 망각에 묻어 떠나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인류의 ‘기억’이 가진 이러한 취약한 특성은 다시 말하면 ‘더 큰 집단의 이익’ 때문이라는 명분하에 기억을 지워 없애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용되어, 진보의 행보를 역행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전쟁과 계속하는 자살 행위가 평화롭고 평온한 생활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영원한 여행의 일부가 되어 왔다.

이러한 실수의 대부분의 진실은 전쟁이 항상 초래하는 인간 고통에 관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능력이 결여 있다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는 한 ‘turning swords into ploughshares(= 싸움을 그만하여 평화로운 생활한다)’ 것은 앞으로도 허무한 꿈으로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이 다시금 매우 중요한 역이 될 수 있다. 즉 그것은 인류의 파괴 능력이 상상의 영역을 훨씬 넘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전쟁이 초래할 비극의 심연을 적어도 현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다. 1945 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에서 살아남은 14명의 피폭자는 바로 이러한 이해에서 그날 아침 원폭에 때문에 찢어진 순진한 청년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말하여 우리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침묵은깨졌다

‘히로시마-드디어 침묵은 깨졌다(Hiroshima – A Silence Broken)’는 (내년 8월 6일) 히로시마 · 나가사키 피폭 70주년을 앞두고 올해 4월에 출판된 적시 책이다. 이 책의 장르는 1927 년부터 39 년까지 태어난 히로시마 원폭 피폭자 14 명의 체험담을수록 한 구술필기 기록(oral history)이다. 그들은 모두 원폭 투하 직후의 참상에 살아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으면서 오래동안 인생을 걸어온 분들이다. 그들의 걸어온 길은 피폭의 후유증 때문에 고통을 받고 평생에 걸쳐 통원해야 하는 것 등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몸에 입은 상처는 종종 오랜 치료를 통하여 치유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대부분이 직면한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차별적인 태도는

아마도 그들에게 신체의 상처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며 오래동안 걸쳐서 마음 깊숙한 부분에 상처를 남기는 것 같다.

원폭 투하 직후의 시기는 일본이(패전직전의) 혼란에 빠진 시기였다. 또한 혼란 전후기의 일본은 미국의 점령 하에 있으며 승리자(=연합국최고사령부 : GHQ)는 자신이 행한 악한 행위가 노출하는 것에 대하여 당연히 반대하였기 때문에 당시 피폭자의 악몽 같은 기억을 말하는 것은 금기되었다. 또한 피폭자는 피폭할 때 받는 끔찍한 상처나 변형된 신체로 살아 가야하는 현실에 복잡한 심경을 안고 있고 서서히 악몽의 기억을 마음 깊은 곳에 봉인해 갔다. 폭발의 중심지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세계가 운이 좋은 것은 상당수의 피폭자가 훗날 침묵을 깨고 각각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히로시마 – 마침내 침묵은 깨졌다’에 수록된 14편의 증언은 각각 독특한 것이다. 피폭자가 경험했던 고통의 깊이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한화상의여성숨진유아고아

키하라 타다시 씨는 원폭투하 직후에 발생한 비극적인 풍경이 뇌리에서 계속 떠나지 않고 있다. 키하라 씨는 피폭시 자신도 부상하고 있었지만 동료와 더불어 히로시마 시내 각지에서 골목길과 무너진 건물의 그늘에 부상자 수색 · 지원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밤에 순찰하고 있을 때 물을 원하는 목소리를 들렸다. 그 목소리는 약하고 필사적으로 호소하고 있었다고 한다. 키하라 씨가 가까이해 보면 그것은 유아를 안은 심한 화상을 입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몸은 온몸에 심하게 화상이었고 유아는 어머니의 유방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잘 보면 유아는 이미 죽은 것으로 나타났다. 키하라 씨는 그 여자가 이미 숨진 자기 아이에게 그래도 모유를 수유하는 것처럼 계속 안고 있던 것은 아마도 현실을 받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고 생각하였다. 키하라 씨는 그때의 심정을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손을 모아 사과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만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고 증언하고 있다.

키하라 씨는 젊은 시절 피폭자임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65세가 된 후 생각을 바꾸고 젊은 세대에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려고 결심했다. 키하라 씨는 숨진 아이를 심한 염증 몸에도 불구하고 안고 물을 원한 그 어머니를 보았던 마음이 아픈 경험을 젊은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잊고 싶지 않다고 강하게 생각한다. 키하라 씨는 오랫동안 마음 아파왔다 그 끔찍한 풍경에 대하여 세계의 어떤 어머니도 비슷한 경험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원망을 품고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었기로 안도의 감정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최신 증언집에 각각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14명의 모두 피폭자는 당시는 건강하고 활발한 소년기의 아이들이었다. 원폭은 그들의 밝은 미래의 꿈을 앗아간 것뿐만 아니라 악몽 속에서도 누구도 상상할 수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이 바꾸어져 버렸다.

그 중에서도 제 마음에 다가온 것은 카와모토 쇼우조우 씨의 체험담이었다. 가와모토 씨는 원폭투하부터 3일 후에 부모를 찾아서 피난처에서 히로시마 시내에 돌아왔을 때 자신이 ‘원폭 고아’가 되어 버린 것을 알았다. 피난처 사원에서 약간의 식사를 받고 있지만 당시 11 세 성장기의 카와모토 씨의 굶주림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시내로 돌아왔지만 고아가되었고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없어진 카와모토 씨는 곧 부랑아가 되어, 그저 살기 위하여 어떨 때는 노점상에서 떡을 훔치고 어떨 때는 (잔 장소와 음식을 얻기 때문에 대가로) 부랑아를 조직적으로 착취하였던 폭력단 밑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가와모토 씨는 이러한 히로시마 원폭이 초래한 이중의 고통 (고아가 된 후에 시설에 넣지 않고 부랑아로 도시의 모두 지역에 방치된 궁극의 어려움)에 빠졌던 아이들에게 대하여 지금까지 많은 것이 밝히지 않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카와모토 씨의 증언에 따르면 원폭투하 전에 피난한 히로시마의 초등학생은 약 8600명이었다. 그 중 2700명의 고아가 발생하였지만 운이 좋게 고아원에 수용된 아이들은 불과 700명이며, 나머지 2000여명은 마을에 방치된 부랑아가 되었다고 한다.

새로운공포

14명의 모두 피폭자들을 연결하는 것은 공통한 고통뿐만 아니다. 자기가 체험해 온 공포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고 자기 자신에게 고립을 과하고 있던 점에서도 공통점이있다. 그런 그들이 침묵을 깨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려고 결심한 배경에는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 분출한 새로운 공포에 대한 위기감이었다. 이후 그들은 방사성 낙진이 일으킨 피해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전달하는 것을 엄숙한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시모이 카츠유키 씨는 TV 프로그램에서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의 건물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본 것을 계기로 원폭투하 후 며칠 동안 그의 동생의 몸에 일어난 일을 생각나서 ‘방사선 피폭 후 목격한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났다’고 말하였다. 동생 아키오 씨는 당시 아직 13세, 원폭 투하시에는 동급생의 나카무라 군과 노면 전차를 타고 있었다. 시모이 씨는 일어난 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20일 정도 지났을까요? 동생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온몸에 붉은 반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동생의 어깨와 팔은 나무 젓가락처럼 가늘어갔습니다. …… 동생은 아직 13 나이인데 노인과 같은 얼굴이되어 죽었습니다. 그 때 같이 있던 동급생의 나카무라 군도 같은 날에 죽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65년 이상이 지나고 TV 뉴스에서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의 건물에서 작업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 근로자의 팔에 옛날 동생을 고통스런 죽음으로 보낸 것과 같은 붉은 습진이 나와있는 것 같았다. 시모이 씨는 이 일에 전율을 생각나었고 이제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높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고 말한다.

피폭자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창가학회 히로시마 평화위원회가 실시한 적시 이니셔티브이다. 동 위원회는 핵시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더 큰 핵무기 폐기를 지지하는 국제 세론을 높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히로시마 – 드디어 침묵은 깨졌다’는 오랫동안 기록되어왔던 히로시마에서 피폭증언집의 아홉째 책이며 ‘2011 · 3 · 1 후쿠시마 원전 사고’이후 처음으로 피폭증언집이다.

창가학회 히로시마 평화위원회는 피폭자의 목소리를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기 위하여 최신 책은 증언의 영어 번역도 붙여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세계가 그 최악의 인간이 만든 재해에서 앞으로 1년 후 70주년을 맞이하는 가운데 이 증언집의 발행은 단순히 과거의 공포를 연상시킴뿐만 아니라 인류 공통의 파괴를 초래하는 죽음의 경쟁을 영원히 멈추게 위하여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도 보여주고 있다. (6.30.2014) IPS Japan/ IDN InDepth News

※ 몬즈루루 하크(Monzurul Huq)는 방글라데시 신문기자이며, 일본 등의 주제에 관한 벵골어 책 3권이 있다. 다카의 유엔홍보 센터와 런던의 BBC월드 서비스에서 근무한 후, 1994 년에 일본에 이주하였다. 방글라데시의 주요 전국지 2개 신문사 (‘뿌로토무 · 아로(Prothom Alo)’ 와 ‘데일리 스타(the Daily Star)’)의 동경 지국장으로 방글라데시의 2개 신문사 외 중요한 간행물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일본과 동아시아 문제에 관하여 영어 및 벵골어로 여러 가지 분야에 집필하고 있다. 동경외국어대학교, 요코하마국립대학교, 케이센여학원대학교에서 객원교수를 역임하고 일본정치, 일본의 미디어, 개발도상국, 국제문제 등을 가르치고 있다. NHK 라디오에도 근무하였다. 2000년부터 외국인 특파원 협회의 회원 및 이사를 2번 맡는 후 동 협회 회장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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